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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erisaie dans mont blanc

이 관계의 나머지 정의를 너에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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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계의 나머지 정의를 너에게

Kinse 2020. 7. 31. 03:01





 에이드는 리스트레토 블랙을 싫어한다. 절대명제와 같은 생각이었다. 싫어할 이유가 많느냐고 물어본다면 종이에 써둔 문장을 읽어 내려가듯 유려한 발음으로 얘기해줄 수 있었지만 그래서 진심이냐고 두번째로 질문이 온다면 답이 멈췄다. 싫어한다면 진즉에 미워 주변에 있더라도 신경 쓰지 않으려 하거나 어떻게든 자빠뜨릴 생각만 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주변을 돌며 한 것들은 시시콜콜한 장난이나 가벼운 동작으로 이따금 서로에게 닿으며 입을 맞췄다. 으레 사람들 사이에선 호감을 표현하기 위해 오고가는 일이 많은 행위를 함께 이어가면서도 싫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치기 어린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으나 스스로를 위한 방어기제기도 했다. 여기서 인정하노라면 돌이킬 수 없는 급류에 휩쓸려 손으로 바로 잡지도 못할 감정에 모든 걸 맡겨버리게 될 거라는 자각은 그 어디에 당도할지 모르는 불투명한 미래임에도 어딘가 언뜻 보이는 듯한 예측에서 기인해 불안해지기 쉬웠다.

 태어나며부터 원해서가 아닌 이유로 유약하게 태어나 어쩔 방도도 없이 쇠약해지기만 하는 손목을 치부로 여겼건만 제 앞에 나타나자마자 잡는 행동에 거부감이 밀려왔다. 누구도 알지 못하길 바랐기에 영악하게 빠른 그의 눈치가 싫었다. 그딴에는 위선으로 점철한 걱정이라도 먼저 건네주려 했을지 모르지만 눈치가 빤한 나머지 그것이 그보다 더 순도 높은 어떤 악질의 감정을 근원으로 뒀단 걸 알아보고 말아 거북함을 느꼈다. 놔. 협박으로 건넸을지 모를 으름장을 놓으며 관계를 정의했다. 남 앞에선 무결하게 존재해야하는 나의 치부를 건드린 녀석, 그러니 에이드는 리스트레토 블랙을 싫어한다. 모순 없이 매끄러운 완전한 문장이 아닐 수 없었다. 만족스러우면서도 잡혔던 손목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이유가 하나라면 언제든 깨질 수 있으니까, 더 견고하게 만들자. 왜 싫어하느냐 물었을 때 막힘없이 납득시킬 수 있도록 관계의 정의를 정리해나갔다. 그가 자신과 다른 족이니까, 유색의 마음만을 취급하는 자신과 달리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들끓는 어떤 부정적인 모든 걸 원천으로 삼고 그런 감정은 죄악에 가까우니까, 죄를 지은 그 선조들이 인정하지 않고 복수를 다짐하며 칼날만을 다듬으며 기회를 노리니까 싫어할 수 밖에 없다, 고. 이는 전적으로 자신을 선의 입장이라 놓은 오만이었다. 하여 진실이 눈앞에 드밀어졌을 땐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어졌다. 마주할 때면 했던 모든 행동들의 기저에 깔려있던 의식들이 떠올라서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졌다. 당장이라도 핏줄에 타고 흐르는 원죄의 근원을 뽑아내고 싶다. 정상적인 상태라고 보기 힘든 어떤 극에 달한 상태에서 계속해서 마주칠 때마다 어떤 시선에 마찰이 일어나 마모되는 느낌이었다. 긁히고 부스러지며 바스라진 잔해가 바람에 날렸다. 그토록 밉다고만 생각했던 그를 볼 때마다 답지않은 죄악감에 휩싸이는 기분이었다. 에이드는 리스트레토 블랙을 싫어해야만 한다. 정의는 절대로 바뀌어서는 안 됐지만 고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걸 여전히 바뀌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때라도 인정해야 했지만 수백의 시간이 지날 때동안 그 짧은 기간의 감정을 지우지 못하고 미련같이 안고 갔다.


 " 가지마. "


 내가 깰 때까지만, 옆에 있어. 당연한걸 요구하듯 뱉으며 내어주는 품을 차지했다. 초등부 말부터, 열병과 함께 지독한 악몽에 시달렸다. 그때 제 힘으로 쌓은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지만 모든게 무너지며 바닥이 없는 아래로 한없이 떨어지는 꿈을 꿨다. 그 이후로 줄곧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악몽들이 해가 지고 달이 뜰 때면 스물스물 기어올라와 지독하게 달라붙는다. 악몽이 가장 마주하기 싫은 걸 무의식에서 꺼내 전시하는게 맞다면 가장 마주하기 싫은 게 모두가 제게서 돌아서는 일이구나 깨닫는다. 그래서 누군가 옆에 있어주길 바랐다. 무방비하게 자는 동안은 그마저도 외로울 정도로 혼자인데 혼자가 되면 꿈이 현실처럼 와닿아 일어났을 때 불쾌하게 뛰는 심장박동을 멈추고 싶어 안달이 났으니까. 자고 일어난 그 순간만큼은 누구라도 곁에 있어 현실이 꿈과 다름을, 꿈이 그저 꿈일 뿐인걸 인지시켜줬음 했다. 그때 그 손을 잡은게 하필 그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왜 너는 내 손을 잡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끄는 힘을 뿌리칠 생각은 못했다. 누구라도 좋았고 그저 지금에서야 아무나는 안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뿐이다. 조금은 찬 손길을 따라 약간 더 큰 품에 기대 눈을 감아 의식이 무의식에 잠기기 전까지 들리는 소리는 낮은 음성과 함께 저와 똑같게 뛰는 심장소리여서 꼴사납지만 안정감을 얻었다.

 꿈에서는 사랑했던― 사랑해줬음 했던 ― 만인이 돌아서서 실망한 티를 숨기지 않고 경멸하듯 저를 버리고 갔다. 그게 무서웠다.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좀 더 잘할게, 실망시키지 않을게, 원하는 대로 할게! 답지 않은 말들을 짓껄이며 어떻게든 잡아보려 했지만 발밑은 질척거려 바닥이 제 구실을 못했고 나아가지 못하게 잡아끌듯 그 자리에 머무르게 했다. 나약하다. 언젠가의 그가 말했듯 어리숙하고 나약하기만 한 자신을 늘 꿈에서 마주했기 때문에 현실에서라도 듣고싶지 않았다.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며 가장 외면하고 싶은 사실을 누군가가 자각 시켜주는 것만큼 불유쾌한 일도 없었으니까. 꿈에서 깨고나면 필사적으로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어울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자야만하는 시간이 가까워질 수록 불안함에 잠에서 도망쳤다. 누군가는 잠으로 도망을 친다는데 꿈에 지배라도 당하듯 꿈 속 모든게 찌르는 칼날같아서 편히 드러눕거나 품에 안을 수 없었다. 내쳐지지 않고 사랑받고 싶어서 몸을 갈고 닳아가는, 누군가 귀에 대고 받고 싶은게 있고 그걸 아무 이유 없이 받을 수 없다면 그만한 노력이라도 하는게 당연한 거 아니겠냐 속삭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응했다. 납득했으며, 옳다 여겼다. 한 편으론 생긴게 예쁘니까 그거만으로도 사랑해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했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는 무리가 있는 공허한 시선이었으니 만족할 수 없었다. 욕심이었지만 한 번 손에 쥐어본 다정과 사랑은 얼마를 쥐어야 할지도, 얼만큼 쥐어도 모자를 정도로 달아서 끝없이 갖고싶었다. 그런 불안정한 상태에서 제게 사랑을 줄리 없는 그의 존재가, 리스트레토, 너라는 사람의 의미는 컸던 것도 같다.

 그럼에도 자신의 무엇에 흥미가 있는지 알고 있어서 악몽이 짙어질 수록 그마저 떠날거 같았다. 흥미가 다하면, 떠날 거 같은 불안함은 결국 사실일게 빤히 보여 그러지 않도록 발버둥을 쳐보려고도 했을지 모른다. 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존심과도 연결됐지만 기껏 세워둔 명제가 거짓이 되기 때문이었다. 참, 이면서도 결국엔 거짓인 절대명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에이드는 리스트레토 블랙을, …….


 " 나는 널 싫어했고,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였지. "


 찰나를 스친 표정을 눈에 담고나니 그 이후의 표정이 들어오지 않았다. 한없이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악몽에서 발목을 잡고 아래로 끌어내려 그 누구에게도 가지말라고 빌 수도, 잡을 수도 없게 묶어두며 저질렀던 마음에도 없던 죄악을 귀에 속삭이는 그 늪이 정신에 안착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그러니 너도 한심한 감정에 집착하는 일은 그만 집어치우고 현실을 직시해. 들려오는 선연한 목소리가 말하는 현실이 뭔지 머리가 멍해졌다. 처음부터 신뢰는 없었고 겨우 조금 생겨 얇은 막처럼 맺힌 것은 알량했으며 그 알량함마저 기껍고 두려워 겨우 정의해놓은 관계를 지키려 아등바등 굴며 만들어둔 걸 해칠까봐 정으로 받아들여 떼어놓으려 했단게, 폐허만치 처참하다. 지독할 정도로 잘 알고 있고 빌어먹게도 잘 해내왔다. 그런데 그때엔, 그때를 비롯해 먼 훗날까지도, 그 먼 훗날이라 생각했던 지금이 되기까지도 단 한번도 다다르지 못했던 지점이 있다. 아무리 싫다하며 애를 써도 결국 죽지 않았음 했으니까.


 " …… 내가 해치려 했던 대상은 너였으니. "


 하여 멋대로 생각했다. 만족스러워 하자고. 그토록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이란 자리를 차지했단 것에 대해 사랑과 다른 어떤 성취감을 느끼자 마음 먹었다. 그럼에도 죽을만큼 받고 싶은건 사랑이었어서 마냥 기쁘게만 받아들일 순 없다. 이따금 생각을 한다. 유색의 감정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살아가는 존재는 이미 증오를 발판으로 침식해가는 존재라는 급류에 휩쓸려 그저 되는 대로 어영부영 휘말리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도착하여 발을 붙이고 있는 건 아닌가. 그리고 그 끝이 어떨지 당시에는 그렇게 예상했다.


 " 그랬겠지. "


 나여야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여야지. 사랑을 받을 수 없다면 최악으로 기리 남아 어떤 미움을 관심처럼 독식할 마음을 먹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생각이란걸 알면서도 그랬다. 갖고싶으면 가져야 했고 가질 수 없다면 다른 걸로라도 대신해야 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의 사랑을 받고싶었단듯 이야기가 흐르지만 생각해보면 그럴지 몰랐다. 사랑을 우습게 여기는 자의 사랑을 받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우스우며 우스운 만큼 비웃어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가 사랑으로 망가지길 바랐던 것 같다. 사랑으로 망가질 수 없다면,


 " …… 내가 미워 죽겠지? "


 저를 너무 미워해 안달이라도 나길 바랐다. 나를, 죽여. 그래, 그 손으로, 제발. 그리하면 기꺼이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어차피 누구에게도 주지 못할 피를 머금고 사랑을 대신 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하트를 손에 쥐어줄 테니. 집착과 같은 감정을 증오를 대신해 품고 손목을 잡힌 채로 당겨 서로의 얼굴을 가깝게 마주한다. 선택지를 쥐어주는 것은 권력자의 권위였고 선택을 하는 것은 그 아래를 맴돌며 기어올라 갈 수도 없는 존재를 위한 것이었으나, 마치 자신이 기회와 선택지를 주겠단 듯 굴었다. 만남부터 그때의 미래였던 현재까지 한 번도 선택지를 그에게 준 적도 없는 선택하는 자였음에도. 사실 그러겠다 선택한 건 자신이었고 그렇게 만든 것이 너라는 것쯤은 알고있었으나 그가 저보다 위에 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울것만 같았다. 함께 있으면 인정하지 못할 일들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들과 인정을 하면 돌이킬 수 없을 듯한 불안감에 휩싸여 누군가 바라는 '에이드'로의 선택이 불가능해졌다. 망가진 기계가 된다면 이런 느낌일거란 생각을 하며 꼴사납게 말끝이 떨리지 않도록 가다듬는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 다음엔 잘 해. 어? 거지같은 꼴 보면서 귀찮아지기 싫으면. "


 자신이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고싶어지면 귀찮아지는 것은 너라는 듯 그에게 말한다. 말은 마치 자신은 그를 죽일 마음이 없다는 듯 튀어나왔다. 허나 죽일 기회는 줄 수 있다고, 그리고 무조건 그 기회를 잡아야만 한다고 그렇게 말을 마쳤다. 돌아온 대답은 분명 만족스러웠는데 이상했다. 숨을 앗듯 맞닿은 입술에 아주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멈춰있었다. 이것 봐, 무엇 하나 제대로인게 없잖아. 머리 속으로 스쳐지나가는 생각을 놓치지 않고 잡아 일그러뜨려 날카롭게 했다. 날카로운 건 생각이나 감정뿐인게 아니라서 이를 세우곤 상처를 입혔다. 상처는 아마 오래갈 터였다. 그러도록 물어냈고 어떤 맛도 느끼지 못하는 입안에 머금어져 타액과 섞여가는 핏물을 닦아낼 마음도 없었다. 스스로가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없는건 어느 누구의 설계인지 편리했다. 비웃음일거라 생각했지만 그때의 표정은 그저 비참함에 잔뜩 물들어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이었을거라고 떠올리는 순간에 상황을 머리 속에서 그리며 생각한다. 남겨둔 상흔이 영역표시 같아 마음에 들었다. 손을 뻗어 쓸어내렸고 후회하란 의미에서 힘주어 눌렀다.


 " 나도 네가 미워, "


 …… 그런데 너만큼은 아닌가봐. 처음으로 인정하는 그 순간 강요받지 않은 자신으로 남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나쁘지 않았기에 어그러진 마음이 기울었다.


 에이드와 리스트레토의 긴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그 이후로는 자잘한 대화만이 가끔 오갔고 의식적으로 서로가 대화를 피했다. 남들은 모르거나 신경도 쓰지 않을 이유를 서로만이 챙겼다. 그마저도 졸업식 전날에는 무너지듯 ― 어쩌면 정신이 나갔을지 모른다. ― 가볍게 굴었지만. 보고싶을 거란 거짓말을 하고 기분이 나쁘라고 사랑한다 속삭였다. 둘은 그런 관계였다. 서로에게 사랑을 얘기하는게 어울리지 않아서 듣는 순간 그 부조화에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에이드는 이때, 리스트레토가 속삭이는 사랑이 자신이 반쯤은 바라고 있는 것이란 걸 알아 더 불쾌해서 항상 먼저 입에 담았으면서도 그에게 졌다. 뻔히 질 것을 알며 싸움을 거는 꼴이었다. 그치만, 그래도, 어쩌면 그래서, 한번쯤은 그에게 듣고싶어 먼저 입에 담았을지 모르는 일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강요받는 상황에 도망치듯 만들어낸 누군가를 자신을 대신해 앞세웠고 비난이 두려워 뒤로 숨은 채 있었지만 결국 숨어도 외면은 다 할 수가 없어 밤이면 잠들지 못하고 괴로워 죄를 고했다. 그런 밤이면 이따금 그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학창시절, 딱 그때에만 머무를 수 있는 관계였으니 미련을 더 두지 말자고 아주 가끔 떠오르는 생각을 그리 지우며 나날히 죄를 쌓아갔다. 가끔 아무렇지 않게 방전되듯 잠들고 일어날 때면 어떻게 그 짓거리를 하고도 잠이 들 수 있냐며 스스로를 힐난했다. 병들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죽지 못했다. 죽을 수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눈 앞이 아득해졌을 때엔 그 얼굴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토록 죽고싶다 생각하고도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미련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네가 생각났다. 그리웠던 것은 아니나 소식이 궁금했다. 죽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살아있다면 어떻게 살아있을지, 한없이 망가진 자신을 보고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다.

 전쟁은 끝났다. 마계는 평화를 찾아갈 것이며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가 바랄 터다. 진실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외면하려는 이들도 있으나 꽃을 꺾어도 봄은 오고 말듯 결국 바로 잡아질 터였다. 평화에 기뻐해야 맞았지만 에이드에게 끝나고 남은 것은 그렇게 버리고 싶던 목숨과 몇의 생을 앗아온 건지도 셀 수 없는 죄뿐이었다. 지킬 필요가 없었던 신념을 가진 존재를 앞세우며 해온 학살을 외면할 수 있는 성정도 아니었다. 정신상태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자신이 죽였던 이들의 남아있을지 모를 가족들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고싶은 충동에 시달릴 정도였다. 차라리 그들이 자신을 죽였음 했다. 죄 지은 자는 단죄받아야 마땅했고 자신에게 내려질 징벌은 그들이 원하는 죽음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끝은 가장 비참한 죽음이어야 했다. 집착에 가까웠지만 에이드는 이를 몰랐다. 어쩌면 회피일지도 몰랐으나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스스로의 죄를 버틸 수 없어 도망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이미 수도 없이 쌓인 자기혐오는 빠져나가지 못할 수렁이 돼서 그 안에 영원히 잠길 것만 같았기에.


 " 모처럼 돌아오셨는데, 괜찮겠어요? "

 " 괜찮아요. 고생하셨어요, 여태. "
 " …… 여러분이 이곳에서 행복하게 지냈더라면, 그건 만족스러울지 몰라요. 지내면서 안정적이라 느끼셨을지 모르지만 영원히 한 곳에서만 머무르는 건 결국 사람을 …… "


 어떻게 만든다고 말을 해야했을까. 말을 마치고, 제 말을 따라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뒤늦게 고민했다. 에이드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과도 같은 가문 단위의 작은 마을을 해체시키고 멸문시켰다. 자신이 처리해야할 하나의 책임이라 생각했다. 그 마을을 만들었던, 그토록 두려워하던 벨로나가 전쟁 중에 결국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기에. 해방은 순식간이었다. 살아온 인생의 반도 넘게 그에게 잡혀있었건만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그는 스러졌다. 인생의 전반을 그에게 바쳐서 오히려 그가 사라지니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게 됐다. 다시 한 번 에이드는 자신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그가 바라는 에이드가 되고자 모든걸 내려뒀다. 신뢰 관계를 어설프게 쌓았던 친구들을, 자신의 기억을, 자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포기했다. 어쩌면 간과하고 살았던 걸지 몰랐다. 언젠가 그가 죽을거라는 생각의 부재. 필멸의 존재가 거대해서 영원처럼 다가왔다. 당신에게 너무 오래 얽매여 있었어요. 죽은 자는 말이 없음에도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묘를 찾아가 처음으로 겁 먹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 말을 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들었다.

 에이드는 하나하나 정리해가던 참이었다. 이따금 법원에 가고 재건 사업을 도우며 고아원에 들려 아이들을 잠깐 마주했다가 화재로 소실된 자연을 복원하러 다녔다. 속죄였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바치며 용서 받고 싶어했다. 용서받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당장에 죽어버릴거 같아 곤란했다. 모든 걸 정리하기 전까진 죽을 수 없었다. 알량한 인간관계도 그 중 하나라 죽기 전에는 그나마 얼굴을 아는, 아직 죽지 않은 친구라 부르기엔 애매한 이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 중엔 리스트레토도 있었다. 살갑게 그의 안부에 대해 물을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그의 생사가 궁금할 법한 사람이 자신이란 생각이 들었다. 냉정하고 이성적이니 어떻게든 살아있을 것이며 마주하게 된다면 비웃음만 살게 뻔했지만 그럼에도, 보고싶다고 생각했다. 삶을 유지하던 틀을 잃었기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흐트러놓고 자신으로 있게 만들었던 그를 찾으려 했을지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좋았다. 학창시절 관계를 모두 증오만 남겨 정의내리려던 에이드가 그 리스트레토 블랙을 보고싶어 한다. 그것만으로 의미는 컸다.


 " 못볼 꼴이군. "


 에이드를 본 리스트레토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2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주하게 됐지만 서로의 외모는 크게 달라진게 없었다. 에이드는 살짝 더 올라가는 눈높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걸 좁히기 위해 자신이 굽이 있는 신발을 신은 것도 아니고 그가 허리를 굽혀주는 건 자존심이 상했으니 어쩔 수 없거니 넘어갔다.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실 그가 보고싶다 생각해서 어렵지 않다 느낀 걸지도 몰랐다. 에이드는 리스트레토의 소식을 알음알음 주변을 통해 전해 듣게 됐다. 묻고 다니진 않았지만, 자신과 같은 몰락한 가문들이 모여있을 때 오고가는 소식으로 그가 결혼할 상대를 구한다는, 조금은 어처구니 없는 내용을. 그래서 바로 찾아보겠다 요구를 했던 걸지도 모른다. 늦어봐야 좋을게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사람 꼴도 아닌 모습으로 그를 마주할 수 밖에 없었고 그의 감상이 그런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지지 않고 톡 쏘았겠지만 그럴 힘도 없었기에 그러려니 넘겼다. 어차피 경멸도 하대도 혐오도 익숙해졌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마주하는 이가 모두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시시콜콜한 안부가 신경전처럼 오갔다. 그러다 먼저 결혼 얘기를 꺼낸 건 에이드였다. 더 신경을 쓰는, 어쩌면 리스트레토는 고려조차 하지 않을 걸 에이드는 이유로 두고 찾아왔으니 이상한 건 아니었다. 둘 사이에 거리낄게 없는 건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숨기는 내용 없이 ― 어쩌면 숨기는 게 없을 거란 에이드의 독선적인 자만이었을지 모르지만 ― 전체적인 내용을 듣게 됐고 다 듣고 난 다음 에이드의 감상은 그는 바뀐게 없다였다. 그게 다행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이 모르는 200여년 간의 시간동안 마음을 고쳐먹고 착실히 살거나 소박하게 살았으리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가 예의 상 내온 차를 마시면서도 독을 타진 않았을까 찰나 의심을 하는 사이. 에이드는 찻잔 손잡이를 잡은 채 엄지로 끄트머리를 매만지며 쉬이 입에 가져다 대지 않았다.


 " 로아이움이면 아무나, 괜찮나? "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툭, 뱉으며 찻잔도 함께 내려두었다. 시선은 마주쳤고 이제 부딪히며 생기는 마찰로 에이드는 닳지 않았다. 닳을 것이 없다에 가까웠다. 시간이 흘러 혼자 쩔쩔매고 곤란해하다 뒤늦게 그의 발목을 잡으려 들었던 어린 날과 달리 마주친 순간에 불을 지를 준비가 됐다. 입꼬리는 올라갔고 잔뜩 초췌해진 얼굴은 예의 여유로움을 띄운다. 자리에서 일어나 위태로운 발걸음을 바닥에 찍어누르며 다가간다. 에이드가 리스트레토의 앞에 섰다. 시선은 여전히 마주한 채였다.


 " 그럼 나로 해. "


 한순간의 충동이었다. 뒤이어진 사유는 다른 이를 희생시킬 바에야 죽기로 마음 먹었던 자신이, 더군다나 오글을 혐오한다 제대로 이미지가 박힌 자신이 오글인 너와 결혼하여 화합하는 꼴을 보여주는 쪽이 효과가 크지 않겠냐는 에이드 나름의 머리를 굴린 그럴싸한 이유였다. 사실 그보단 그 누구에게도 그런 유일한 자리를 내어주기 싫었다는 감정이 컸다. 소유욕이라 이름을 붙인다면 그렇게 불러줄 수도 있는 어떤 자존심과 같은 그다지 소용도 쓸모도 없는 욕망.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상태나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일줄 알게되는 상태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에이드는 어른이 됐다. 에이드는 리스트레토 블랙을 싫어한다. 하지만 그를 욕망한다. 손으로 잡고 흔들고 밀쳐내 바닥에 떨궈 그가 산산히 조각나길 바랐다. 어차피 지옥을 걷는 자신은 얼마나 더 밑바닥과 나락을 기어다닌데도 상관이 없었지만 그렇다면 그와함께 잠기고 싶었다. 에이드는, 리스트레토와 함께, 침몰하길 바랐다.

 예상외로 리스트레토는 에이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에이드의 그럴싸한 사유가 생각보다 괜찮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에이드, 라는 이름을 빼놓고 조건만 본다면 괜찮은 시나리오와 아이디어였으니까. 그럼에도 에이드가 걱정했던 것은 순전히 자신이기 때문에 그가 거절하는 상황이었다. 에이드는 살아있는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보다도 리스트레토 블랙을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아마 그가 말해주기 전까지, 그또한 제게 그리도 자존심을 세우던 존재를 손에 쥐어 뒤흔들어 놓고 싶단 욕망이 있었다는 건 알지 못할 터다.

 부적절한 서로의 이득을 위해 표면뿐인 사랑을 연기하기로 하며 둘은 결혼을 위한 맹세를 써내려갔다. 남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영원을 맹세하고 평생을 서로에게 바치려고 하지만 둘은 이득과 합리를 위한 계약과 조항을 적어내려갔다. 멸문으로 돌아갈 곳을 잃은 에이드의 돌아갈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증오하던 리스트레토의 품이 됐다. 완벽한 행세를 위해서인지, 자기만족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대우를 해주겠다던 그 말에 대한 책임인지 리스트레토는 에이드에게 극진했다. 의심할 구멍을 만들지 않는게 좋기야 했지만 그런 그의 태도가 어색하고 우스운 것이 에이드의 시각이었다. 혼인 날짜를 정하고 그의 집에서 머무르며 에이드는 생각했다. 드디어 자신을 억압하고 짓누르던 존재가 사라져 자유를 찾은 다음 고른 거처란 곳이 싫다고 못을 박고 갖은 이유를 들어 증오하고 물어뜯으며 다음 만날 때는 후회하지 않게 자신의 숨통을 제대로 끊어놓으라 으름장을 놓았던 상대라는게, 스스로가 자처하는 불행이란게, 누군가의 존재를 자신의 단죄로 여긴다는게 너무나도 우습고 같잖아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 너말이야, 의식주만 챙겨주면 할 일 다 했다 생각하는거야? "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결혼을 올리고 한참을 건조하게 남에게 선전하고 전시하듯 살며 이미지를 굳혀가고 어느정도 여유가 생길 쯤부터 에이드는 불만이 생겼다. 리스트레토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나 가벼운 관계라도 좋으니 일시적인 애정을 채우기 위해 몸을 맞대고 살아온 에이드에게 있어 그에게만 묶여 사랑받지 못해 ― 행위가 사랑의 일종이나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엔 시간이 오래 걸렸다 ― 쌓여가는 욕정에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렇게 얻어낸 관계가 비록 폭력에 점철돼 있었지만 어차피 고통은 오래 머무르지도, 뇌에 올라와 닿지도 못했다. 살갗이 닿아 자기보다 낮은 체온을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느끼며 잠에 들었다. 악몽으로 오랜 시간을 시달리다 찾아낸 도피가 꿈조차 꾸지 못할 상태에서의 기절 내지 그의 품에서 잠드는 거란 거부터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구나 느꼈다. 에이드는 리스트레토의 품을 차지하는 것은 포기했다. 어떻게 머리를 굴려도 그가 자신을 껴안고 잘 이유를 찾지 못해서였다.

 한동안 그런 비정상적인 관계가 이어졌다. 그러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에 가끔 비참하고 절박한 기분이 들어 그만두고 싶어졌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와 크게 싸우고 결국 흐지브지하게 끝난 채 그에게 잔뜩 화풀이를 하고 혼자 잠들어 보려 한 날, 몇시간이고 미친 사람처럼 스스로에게 자장가를 불러보던 에이드는 결국 잠들지 못해 자신의 한계와 상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됐기에. 그 앞에서는 절대 울고싶지 않아 그가 없을 때나 이로 인해 울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티를 낸다고 바뀌는 게 있는 것도, 이미 그의 손아귀에 잡혔으면서도 약점은 더 쥐어주고 싶지 않았던 탓도, 그저 홀로 풀어내고 쌓고 정리하는 것이 편해졌던 것도, 모든 게 이유였다. 에이드는 리스트레토 블랙의 사랑을 받고싶은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요구하는 것들에 일말의 애정이 서려있길 아주 바라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게 에이드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비참함은 에이드를 무너질 수 없는 상태에서 더 무뎌지게 만들었다. 아니면 유약한 마음이 다시 그에게 기운 탓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가볍게 그와 입을 맞출 때부터 기약된 미래였다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에이드가 리스트레토 블랙의 애정을 갈구한다. 욕망은 지니고 있다보면 커질 따름이었다. 자신의 살갗에 닿는 낮은 체온을, 이따금 스치는 시선을, 나직하게 부르는 음성을, 그럴싸한 이유를 들어가고 까다롭고 성가시다 생각될 만큼 요구하면 결국엔 못이기고 들어주는 그런 모든 것들을 바라고 원하고 의식하게 되며 느끼던 안정감이 미묘한 떨림을 만들어냈다. 그 감각에 취할 때면 에이드는 이상하게 일렁이며 울렁거리는 감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다시 그의 손길에 기대면 진정되는거 같아 점점 더 찾게 됐다. 그러니 끝이 없었다. 행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애정이라면 그것만 있는줄 알았던 주제에 그저 잠깐 뺨을 스치고 지나가다 머무르는 감각에 눈을 감고 기대게 되고 그저 가볍게, 의도와 의미는 어떤 것이어도 좋으니 자신을 품에 가두거나 애정 어리게 입을 맞추길 바랐다. 에이드는 이름이 에이드 블랙이 되며 리스트레토 블랙을 자빠뜨릴 생각 밖에 없었건만 먼저 마음을 줘버리고 말았다.

 마음을 깨닫고는 더 치밀하게 굴 생각이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은듯 둘 사이가 미미하게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습기 짝이없다. 둘의 사이는 처음부터, 제대로인 것이 없었다. 에이드는 리스트레토 블랙을 싫어한다. 싫어해야만 한다. 욕망하게 됐으며, 결국엔, 결국엔. …….


 " …… 오늘부로 여기서 나가줬음 좋겠군. "


 더이상 너와 연기하는 것도, 널 안는 것도, 사랑한다 하는 것도 힘드니까. 떨어지는 음성에 고개를 들어 그와 마주한다. 서로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가장 가까이에 두고 서로의 약점이 될 사이임에도 서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 둘인양 감추고 한 발자국 물러나 보던 서로가 표정을 드러냈다. 리스트레토의 앞에선 울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굳게 홀로 스스로에게 맹세했던 바와 달리 울듯 변해버린 얼굴이 풀리지 않았다.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사랑을 바란다는게 티가 나고 말았던게 분명했다. 더이상 제 장단엔 어울려주지 못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웠다고 느꼈다. 자존심 뿐인 존재면서도 그에게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주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었으나 자기가 사랑하게 됐기에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표현하지 못할 사랑이래도 안고 숨죽여 살아가고 싶을만큼, 사랑을 …… 에이드가 리스트레토를, 사랑하게.


 " 거짓말이, 질린거야? 아님 고작 그런 거짓말 하나 못할 정도로 내가 질린거야. "


 울음이 타고 흐를거 같아 눈앞은 흐려진다. 에이드가 리스트레토 앞에 선다. 시선은, 마주하고 있었나? 손을 잡고 끌고 손안에 담기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낮은 체온을 느끼며 떨리는 턱을 움직여 말을 만들어낸다. 의연하고 태연하게 발음을 해 문장을 뱉어내려 해도 눈과 인접해있는 뇌가 저릿할 정도로 벅찬 슬픔이 몰려와 숨이 떨렸다. 그럼에도 말해야 했다. 전하지 않으면 답을 들을 수 없다. 에이드는 리스트레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모르는 부분이 없다는 말은 되지 않아서,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게 있어서, 그것이 지금 그의 말의 뜻이라서 어떻게든 입을 열어야 했다. 비록 토해내는 말끝이, 숨결이 볼썽사나울 정도로 떨리더라도.


 " 대답해, 리스트레토. 거짓 사랑이 질린건지, 내가 질린건지. "
 " 거짓된 이 행위가 질린거라면, 내가. …… 내가, 다 사랑할 테니까. 제발 너마저 날 버리지 마. "


 이건 날 죽이는거야. 아직은, 죽고싶지 않아. 네 곁에 있고 싶어. 시선을 고정한 채 차분히 말을 이어간다.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다 결국엔 사실로 굳어진 진작에 전해야 했을 마음을 꼴사나운 순간에 전하고 만다. 거짓이 아닌 진심을 원한다면 네게 줄게, 마녀의 심장은 붉게 변하기 힘든만큼 영원하고 견고하니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목숨과도 같은 마음을 네게 줄테니 제발 버리지 말아달라는 애원이었다. 세상 최악의 구애다. 목숨을 걸고하는 협박으로 들릴 수도 있었으나 협박이라기엔 절박하기 짝이 없었다. 울음이 턱끝까지 차올라 마구 떨리며 표정은 모든 여유를 잃었다. 그럼에도 리스트레토가 그에게 하는 말은 그러겠노라는 말이 아니었다. 떠나지 않겠다 고집부리는 아이를 달래듯 회유하는 말이었다. 버리는 것이 아닌 도망칠 기회,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에이드는 리스트레토에게서 도망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그가, 마법이라면 진절머리 나도록 쓸 줄 아는 그가 그에게서 도망치지 않은게 능력의 부족이나 그가 두려워서가 아니란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럴지도 몰랐다. 에이드와 같은 케이스를 그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건 아니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모든 걸 꿰뚫어보듯, 알고있는듯, 이해한듯 굴었던 그가 그렇게 말해오니 설움은 커질 수 밖에 없다.


 " 도망치고 싶었다면, 그러고 싶었다면 진즉에 도망쳤어 난! "
 " 내가 네 옆에 있는 건 네가 두려워서도, 뭣도 아니야. 내가 네 옆에 있고 싶기 때문이야. 아직도 그걸 몰라? "


 차오른 설움이 결국 흘러내린다. 뺨을 타고 뜨겁게, 방울져 떨어지다 물줄기를 만들며 울컥울컥 쏟아지는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눈앞이 뿌얘 분명 바라보고 있다 생각한 그가 형체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 넌 왜 다 아는 것처럼 굴면서 하나도 몰라? 억울하게 토해내는 목소리가 흩어진다. 그가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다. 분명 어렸을 땐 스스로의 표정을 보지 못해 한없이 비참했던 그 때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만족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보지 않아도 자신이 얼마나 서글프게 우는지 알 수 있어 더 참을 수도, 버틸 수도 없었다. 잡아주던 이성이 가닥가닥 끊기며 바닥에 주저앉게 만들었다. 잡고있던 손이 거두어지고 허공에서 움직이다 멀어지고, 결국엔 그림자조차 떨어지며 사라지는 걸 느낀다. 버림받았다. 버림 받지 않았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적어도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만이 확실하게 와닿는 느낌이었다. 눈가가 뜨겁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턱끝에서 뚝뚝 떨어지며 말을 하느라 참았던 불분명한 발음의 오열이 간헐적으로 터졌다.


 " 떠나고 싶지 않아. "


 제발, 제발 나한테 죽으라고 하지 말아줘. 듣는 이 없는 자리에 못박힌듯 서 빌었다. 사람을 수없이 죽인 인간이라 불러주기 아까운 존재가 사랑을 하며 살아가고자 마음을 먹었다고 신이 벌을 내린듯 했다. 에이드는 리스트레토의 옆에서 고통받을 것을 생각하며 이것이 자신의 단죄이리라 믿었지만 벌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 사랑하게 돼서 살아가고 싶어지는 것. 삶을 져버리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일만 번을 죽어도 좋다 생각한 목숨을 아주 조금이라도 그와 더 살아가고 싶어 미련처럼 잡게 되는 것이, 그렇게 갖게 된 희망을 져버리고 짓밟는 것이 벌이었다. 한참을 울다 결국 어느것도 챙기지 못하고 자리를 뒤늦게 벗어났다. 사실 에이드가 그 집에서 챙길건 없었다. 에이드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거라곤 어느것도 없었다. 지금 당장 그가 챙기고 싶은 것은, 아니 그가 바라는 것은 그에게 소유되는 것이었지만 이미 한 번 부정당했기에, 미련을 갖지 못하고 갈 곳도 없이 발을 옮겼다.

 죽은듯 살아갔기에, 그리고 전부 다 깨진 계약임에도 쌓아 올린 이미지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서 쉬이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죽겠다 마음을 먹고 모든 것을 정리했다. 돌아갈 곳은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 먹고 에이드는 리스트레토를 찾아갔고, 리스트레토는 그의 거처가 됐다. 돌아갈 곳에서 내쫓긴 이가 갈 곳이 어디가 있겠냔 말인가. 에이드는 땅이 흔들리는 기분으로 사람들의 시야를 피해 걷고, 걸으며 한참을 고민하다 자신이 무無로 돌린 마을로 돌아갔다. 이미 사람의 손을 타지 못한지 오랜 시간이 흘러 자연에 파묻혀버린, 사람의 발길이 끊겨 길마저 사라진 곳을 기억에 의존해 들어가며 천장이 헐고 문이 뜯어진 학대와 방치로 유년기의 기억을 전부 차지한 익숙하지만 이젠 폐가가 된 저택으로 들어섰다. 물건을 정리하거나 하진 않아 모든게 그대로였다. 이따금 꺼진 바닥에서 풀이 자라나 올라와 있고 벽을 타고 오른 덩굴이 깨진 창틈으로 들어와 집안까지 손을 뻗쳤지만, 적어도 버리지 않은 물건들은 모두 그대로있어 기이한 꼴을 만들어냈다.

 아무도 없기에 어떤 꼴로 울거나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드는 신을 믿지 않지만 그때만큼은 그 무너진 집안에서 초라하게 입은 채로 바람이 드나드는 와중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며 빌었던거 같다. 모든걸 잘못했으니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사랑하게 된 것으로도 충분히 제게는 벌이 됐으니 차라리 보답받지 못할 사랑을 하게 하는 걸로 엄벌해달라고, 그마저도 안 된다면 당장 숨을 끊어달라고 빌다 지치면 엎어져 눈을 감고 악몽에 깨고 다시 눈을 감길 반복했다. 구멍이 뚫린 천장으로 마계의 달빛이 내리며 집안에 날리는 먼지가 빛처럼 떠다녔다. 관리받지 못하고 낡은 저택은 인기척을 숨기지 못했다. 삐걱거리며 들리는 발소리와 가까워지는 그림자에 경계하며 고개를 들면, 그곳엔.


 " …… 리스. "


 울음으로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불러낸다. 급하게 나와 외출복이 아닌 모습으로 서있는 리스트레토가 에이드의 앞에 섰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에이드를 일으키는 손길에 잔뜩 힘이 들어가있다. 둘렀던 외투를 어깨 위에 올려주며 머뭇거리던 입에선 분명 바로 전엔 떠나란 말이 나왔는데 이젠 돌아가잔 말이 흘러나왔다. 둘러진 외투를 손으로 잡으며 입을 달싹이다 그저 힘없이 기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머릿속에선 나가지 않아도 되냐는, 옆에 남아도 되냐는 불안에 찬 질문들이 맴돌았지만 그저 찾으러 와준 것이 반증으로 허락이 됐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떠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으니 그리 위안을 삼으며 그를 따라 돌아갔다. 미련을 버리겠노라 돌아갈 곳을 죄 없앤 에이드가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리스트레토에게로.

 그 이후 무슨 대화를 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에이드는 중요치 않다 느꼈을지도 몰랐다. 그의 곁에서 떠나지만 않는다면 대화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럴 사이가 아니었지만, 새로 정의 될 관계에선 그래도 되리라는 생각이 어렴풋 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잡았던 손을 놓기엔 가깝게 맞닿아 급하게 놓아 보았지만 놓고 난 이후 다시 찾아 잡았고 다시는 놓지 않기 위해 힘을 주었다. 제대로 된 고백은 오가지 않았다. 요구와 허락, 부탁과 결과만이 둘 사이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에이드는 그와 떨어져 지냈던 반평생의 정의를 무너뜨린다.


 에이드는 리스트레토 블랙을 사랑한다.
 리스트레토는, 에이드 블랙을.




🖤❤️


사랑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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